Saturday, January 27, 2007

차라리 '국민' 안하고 싶다는 한 시인

[한겨레신문]

몇 해 전, 1년여 간 긴 여행을 다녀오니 경고장과 함께 연체된 건강보험료에 대해 강제추징을 하겠다는 통지서가 와 있었다. 당장 목돈의 건강보험료도 부담이긴 했지만, 무엇보다 강제추징 통지서의 내용이 사람을 범죄자 다루듯 해 불쾌감이 컸다. 그때 처음으로 내 의지로 가입하지 않은 건강보험이란 것에 회의가 들었다.

나는 병원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감기나 웬만한 잔병 같은 것은 집에서 앓고 시간 속에서 견디는 편이어서 병원 가는 횟수가 극히 드물다. 언젠가는 내게도 크게 필요한 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보험료를 내왔지만 긴 여행에서 빈털터리로 돌아온 그때의 형편을 감안하면 더욱 아까운 돈이었다.

그렇다보니 추징 경고장의 내용과 형식이 더욱 심화를 돋우고 급기야 보험 공단에 전화를 걸었더랬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 가입되었으니 연체금액은 물론 보험료를 납부하고 싶지 않다. 마치 세금 떼어먹은 사람 취급하는 경고장이 날아왔는데 건강보험이 강제로 내야 하는 세금이냐….

흥분해 묻는 나에게 돌아온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건강보험은 사회보험이고 국가에서 강제하는 준조세가 맞다는 거다. 보험료 안 내면 강제추징 하는 게 당연하다는 말을 들은 나는 할 말이 없었는데, 공단 직원이 점잖게 몇 마디 덧붙였다. 건강보험은 당장 내가 안 아파도 내가 낸 보험금이 가난한 사람들의 의료급여로 사용되는 일종의 공적부조, 사회보험입니다. 알 만한 분이 왜 이러십니까.

나는 멋쩍게 전화를 끊었다. 병원 혜택을 그다지 받지 않는 편이니 억울하다는 생각만 했을 뿐 내가 낸 돈이 가난한 이들의 의료혜택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터라, 스스로 공적부조의 필요를 인정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카드 할부로 보험료를 지불했던 그때로부터 꽤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도 이 나라에서 조세의 의무를 꼬박꼬박 지켜야 하는 이 ‘국민됨’에 종종 회의가 올 때가 있다는 것은 속일 수가 없다.

일 때문에 이주일에 한번 서울에 간다. 그때마다 산야를 난도질하는 각종 도로공사와 토목공사 현장에 내가 내는 세금이 들어가는 것 같아 마음 무거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 행복에는 눈곱만치도 관심 없이 오로지 자기 이익과 정권 잡기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 월급과 품위유지비에 내가 낸 세금이 포함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울화통이 터진다. 유령처럼 떠도는 ‘국익’과 ‘국민됨’에 한없는 회의가 들지만 참고 산다.

그런데 이 ‘참고 살기’에 절망하는 일들이 발생하곤 하는데, 최근 나는 또다시 중얼거리게 되었다. 아, 정말 세금 내고 싶지 않다… 라고. 티브이에서 한미FTA체결의 ‘국가적 정당성’과 비전에 대한 정부 광고를 본 날이다. 저런 광고를 만들어 ‘국민’들을 세뇌하는 데 바로 국민들이 낸 세금이 쓰인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어졌다. 예전처럼 전화라도 걸어 따지고 싶었다.

이미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듯 한미FTA는 위험한 독배다. ‘주고받기’의 과정에서 우리가 받을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나 있다. 그나마 정부가 내세우는 ‘성장동력 재구축’이라는 협상의 이점마저 아무런 데이터 없는 빈 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모든 것이 막판까지 비밀이고 밀어붙이기인 것도, 지지부진한 협상과정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위급 차원에서 협정체결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분위기 조성을 하고 있는 것도 모두 기분 나쁘다. 그러니 나는 내가 낸 세금의 털끝만큼도 저런 광고를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을 동의해 줄 수가 없다.

이런 판국에 정말이지 나를 열받게 하는 소식이 또다시 들렸다. 한미FTA 최대 희생물이 될 농민들이 푼푼이 ‘나락 모으기’ 운동을 벌여 마련한 성금과 영화인들의 제작지원으로 만들어진 한미FTA 반대 광고 ‘고향에서 온 편지’가 광고심의기구의 ‘조건부 방송가’ 판정을 받으며 사실상 방송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정부광고’는 되고 ‘국민광고’는 안 되는 이 기묘한 판정이 ‘국민참여정부’라는 이천 년대의 우리의 현실인지 한숨이 나온다. 도대체 ‘정부’는 ‘국민’의 무엇인가. 다시 물을까? 도대체 ‘국민’은 ‘정부’의 무엇인가. 국민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는 정부를 예전엔 독재정권이라고 했던가. 국민의 입과 귀를 강제로 가리는 역할을 하던 각종심의기구들을 독재의 하수라고 예전엔 불렀던가. 오로지 예전에?

박종철이 고문사한 지 20년이 흘렀다. 겨울에 그는 죽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유월 항쟁’의 ‘국민’들이 독재타도와 민주쟁취의 함성으로 거리를 메웠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아프게, 조금씩 바뀌어 왔다.

그런데 오늘, 도대체 무엇이 바뀌어왔나를 되물어야 하는 현실 앞에서 막막하다. 이 정부를 보는 일이 분노를 넘어 안쓰럽기까지 하다. 미국 쪽의 일정으로 4월 이전에 한미FTA 체결여부가 결정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에 들씌워진 것일까. 입으로는 미국에 대해 ‘자주’니 ‘자존심’이니 내세우며 거친 폼을 잡으면서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이라크 파병이나 미군기지이전, 소파협상, 무기구매 등이 다 같은 맥락의 꼴불견 아닌가.

한미FTA가 나와 내 이웃들의 살림을 파탄낼 것이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인 나는 조건이 안 맞으면 체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협상 아닌가 하고 묻는다. 그게 아니라면 ‘국민’인 나를 설득해 보라. 내 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 국민 안 하면 안 됩니까? 국민의 여론일랑 관심 밖인 정부광고 말고 고향의 어머니 아버지들 목소리를 전하는 광고에 세금 내고 싶습니다. 여름의 항쟁처럼 봄의 항쟁을 위해 세금 내고 싶습니다.

김선우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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